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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은 없다”(Race is Bo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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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겸 댓글 0건 조회 150회 작성일 24-09-0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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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은 없다”(Race is Bogus) - (1)

김영봉목사, 로마서 10:9-13을 바탕으로 인종주의를 말하다

  • 기사입력 2017.08.21 06:30 
  • 최종수정 2017.09.13 20:36 
  • 기자명깅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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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러츠빌에서 발생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 사건은 충격적이다. 한국교회, 한인사회에도 크고 작은 인종차별주의가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영봉목사(사귐의 교회)는 두 차례에 걸쳐 로마서를 바탕으로 그 고민을 나눈다. 오늘은 그 첫번째 메시지이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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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우월주의를 기반으로 일어난 샬러츠빌 테러사건은 "인종과 테러"(Race and Terror) 이슈를 상기시킨다. (VICE News Tonight 화면 갈무리)

​1. 한 동안 북한의 도발과 트럼프의 과도한 위협적 발언으로 인해 모두의 관심이 북한과 미국 사이의 무력 충돌 가능성에 쏠려 있었는데,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그 관심이 샬롯츠빌로 집중되었습니다. 8월 11일부터 12일 사이에 샬롯츠빌에 있었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집회와 그로 인해 발생한 폭력 사태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한 사람이 고귀한 생명을 잃고 여러 사람이 부상 당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가 벌인 또 하나의 테러 사건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입니다. 그동안 테러 행위를 신속하고 신랄하게 비판해 온 트럼프는 이번에 발생한 백인 우월주의자의 테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않다가 이틀 후에 나타나 그들의 폭력과 테러를 묵인하고 응원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 놓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우월주의자일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그의 본색이 드러난 것입니다.

Youtube에 들어 가 ‘Race and Terror’라는 제목을 검색하시면 약 20분 정도의 분량으로 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번 사건을 누가 촉발시켰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들은 남부연합군의 영웅인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에 반대하는 집회를 하겠다면서 ‘Unite the Right’(우파를 결집시키라)는 이름으로 집회 허가를 받았습니다. 허가 받은 날 전야에 그들은 횃불을 켜 들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그들이 행진하면서 외친 구호는 섬뜩합니다.

You will not replace us! 너희는 우리를 밀어낼 수 없다! 
Jews will not replace us! 유대인은 우리를 밀어낼 수 없다!
Blood and soil! 피와 땅!
Whose Streets? Our Streets! 누구의 거리냐? 우리의 거리다!

“Blood and soil!”이라는 구호는 독일 나치들이 외친 “Blut und Boden”의 영어 표현입니다. 순수한 혈통과 영토를 지키자는 뜻입니다. 그러한 이념에 기초하여 나치 독일 정부는 아리안족 이외의 모든 인종을 멸절시키거나 몰아내려 했습니다. 6백만의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 집회에서 이 구호를 외친 이유는 우월한 백인종의 혈통을 지키고 땅을 지키자는 뜻입니다. 뒤집으면 다른 인종을 몰아내고 빼앗긴 기득권을 되찾자는 뜻입니다.

이번 사고 현장에 적지 않은 수의 ‘시민군’(militia)이 개인 무기로 무장하고 집결해 있었습니다. 사태 진압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해 어떤 경찰이 “그들의 무력이 경찰보다 더 강력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여차 했으면 독립 전쟁 때처럼 시민군과 경찰의 전투가 벌어질 뻔 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대통령이 이번 폭력 사태의 책임은 양편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편은 인종 차별적인 구호를 외치며 다른 인종을 몰아내자고 집결했고, 다른 한 편은 그 소식을 듣고 인종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한 편은 공격 무기로 무장했고, 다른 한 편은 깃발과 팻말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충돌이 발생하고 희생자가 났는데 그리고 그 희생은 나치즘에 세뇌된 한 백인 우월주의자가 ISIS의 테러 방식을 모방한 것이었는데, 어찌 양측에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번 사태로 인해 그동안 트럼프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특히 소수 인종으로서 트럼프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번 사태로 인해 깊은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사무엘기하를 읽으면서 솔로몬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 위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모두의 발등에 떨어진 이 문제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야 한다는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인종주의와 백인우월주의입니다. 이 문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우리가 매일 겪어야 하는 문제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과 다음 주일, 두 주에 걸쳐 이 문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2. 먼저, Racism 즉 ‘인종주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말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인종차별주의’라고 해야 합니다. 메리암-웹스터 사전(Merriam-Webster Dictionary)은 Racism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A belief that race is the primary determinant of human traits and capacities and that racial differences produce an inherent superiority of a particular race.

인종이 인간적인 특징과 능력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이며 그 인종적 차이가 그 인종의 태생적 우월성을 만들어 낸다는 믿음.

우리말 사전도 ‘인종주의’를 유사하게 정의합니다. 네이버 사전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인종 사이에 유전적 우열이 있다고 하여 인종적 멸시, 박해, 차별 따위를 정당화하는 주의.

두 정의에서 보듯, 인종에 대한 편견과 그 편견에 따른 언행이 인종주의입니다. 대개는 자신이 속한 인종이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도 이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부르던 비하적 칭호에 그런 사고 방식이 배어 있습니다. 중국 사람을 ‘떼놈’이라고 부르고, 일본 사람을 ‘쪽발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 다른 민족을 깔보는 것이 우리의 습성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지만, 그런 성향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미국 사람’ ‘중국 사람’ 해도 될 것을 ‘미국놈’ ‘중국놈’이라고 부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어느 민족 누구게나 있는 경향입니다. 대륙간 열차가 러시아의 동쪽 어느 변방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어느 마을에 열차가 멈추니 그곳 주민 부부가 열차에 올라 탑니다. 그들의 맞은 편에는 프랑스에서 떠난 선교사 부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 부부가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 주민이 지켜 봅니다. 얼마 후에 남편이 아내에게 자기들 방언으로 이렇게 말했다지요. “신이 우리에게는 인간의 언어를 주셔서 다행이야!”

자신이 속한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우월하다는 편견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원죄의 한 증상입니다. 그런 편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많습니다만, 그 편견에 힘이 결부되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우월함의 증거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가지는 힘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다른 인종에게 힘이 없는 이유는 그들의 열등함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월함을 지키기 위해 혈통을 순수하게 지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Blood and Soil!’ 즉 ‘피와 땅!’ 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문제는 Race 즉 ‘인종’이라는 개념이 허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과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인종’ 개념의 뿌리와 정체를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많은 연구의 결론은 “인종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 중 하나인 조셉 반트(Joseph Barndt)는 그의 책 <Understanding & Dismantling Racism>에서 ‘인종’ 즉 Race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Race is an arbitrary (specious, false) socio/biological construct created by Europeans during the time of world wide colonial expansion and adapted in the political and social structures of the United States, to assign human worth and social status, using themselves as the model of humanity, for the purpose of legitimizing White power and White skin privilege. (p. 72)

인종은 유럽인들이 전세계적으로 식민지를 확장해 나갈 때 만들어졌고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에 사용된 인위적인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은 허구인) 사회적/생물학적 개념이다. 이 개념은 자신들을 이상적인 인류로 설정하고 백인의 힘과 백색 피부의 특권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인간의 가치와 사회적 신분을 정한다.

결국, 인종이라는 개념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을 지키고 영속화시키기 위해 만든 허구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인류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인종을 구분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피부색에 따라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같은 인종이 존재하며 인종에 따라 우열이 있고 특성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백인들이 만든 프레임에 속아 살아 온 것입니다. 지금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그 프레임을 영속화 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인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족도 있고, 종족도 있고, 나라도 있습니다만, 인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없습니다! 피부 색깔은 우리의 존재나 정체를 증명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나의 피부 색깔과 다른 사람들은 나와 근본적으로 거의 동일합니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인류는 DNA 상 99.5%가 동일합니다. 차이는 오직 0.5% 밖에 없습니다. 피부 색깔에 기초한 모든 판단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주입된 편견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3. 인종주의의 가장 사악한 결과물이 노예 제도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노예 제도를 철폐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는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기독교는 더 오랜 세월동안 노예 제도를 옹호하고 유지했던 강력한 요새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 본문을 왜곡하여 흑인의 열등성 혹은 열등한 운명을 신이 정한 몫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두 개의 성경 본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표’입니다. 동생 아벨의 죽인 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자 가인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당시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 밖에 없었으니 얼른 보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라는 말이 모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가인의 생애 기간 동안에 인구가 급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 4: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받은 표가 피부색이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해석이 고대 교회로부터 유행했습니다. 나중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그 해석을 흑인에게 적용했습니다. 하나의 오역은 다른 오역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흑인은 첫 살인자인 가인의 자손이다”라고 비약하고, “흑인은 가인이 받은 저주를 짊어져야 마땅한 사람들이다”라고 비약합니다. 이 해석을 받아 들이면 흑인은 당연히 노예로 살아야  하고 노예로서 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간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은 잘 못된 것일 뿐 아니라 사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증명합니다.  

또 다른 구절은 창세기 9장에 나오는 함에 대한 노아의 저주입니다. 노아에게는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40일 간의 홍수로 인해 모든 생명체가 멸절된 후에 노아의 가족만 구원을 받습니다. 홍수가 지난 후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 옷을 벗고 곯아 떨어집니다. 함은 그 모습을 보고 비웃었는데, 다른 두 아들은 옷을 들고 뒷걸음질 하여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주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 그 사실을 안 노아는 아들들에게 저주와 축복을 선언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다. …셈의 주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셈은 가나안을 종으로 부릴 것이다.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셈의 장막에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종으로 삼아서, 셈을 섬기게 하실 것이다. (창 9:25-27)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함과 그 아들이 다른 두 형제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 아닙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도 아닙니다. 잠에서 깨어난 노아가 아직도 술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뱉은 저주입니다. 그 저주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함과 그 아들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 저주와 축복의 발언을 더 확대하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이 본문을 자기들 좋을대로 왜곡 했습니다.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셈은 셈족의 조상 즉 황인종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은 유럽인종 즉 백인의 조상이 되었으며, 함은 햄족 즉 흑인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저주대로, 흑인에게는 백인과 황인종의 노예로 살 운명이 주어졌습니다. 백인종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은 야벳에 대한 노아의 축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도 어릴 적에 교회에서 이렇게 배웠습니다. 그 때는 당연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만일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는 분을 안다면 혹은 그런 교회를 안다면, 당장 관계를 끊고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일입니다. 악한 일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인종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부색을 근거로 흑인과 백인과 황인을 구분할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힘을 가진 백인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한 것입니다. 세 아들에 대한 노아의 저주와 축복이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특정 인종을 저주로 운명지었다는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결국 백인 기독교인들이 흑인을 차별하고 노예 제도를 지지했던 것은 그들이 믿던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본성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시킵니다. 노예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고 지켜온 것은 성경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한 욕망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성경을 오용할 때 그 폐해는 참으로 심합니다.

 

4. 성경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를 반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노예 제도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것이 미국에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지도력에 의해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노예 제도의 바탕이었던 인종주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지배하고 있고, 노예 제도는 사라졌지만 노예적 삶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살피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고 방식에 동의할 수 없고 또한 이러한 현실을 묵인해서도 안 됩니다.

인종주의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성경적 근거를 모두 열거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오늘 세 가지의 증거만 말씀 드립니다.

첫째, 창조론적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인종별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인종은 생물학적인 개념도, 인류학적인 개념도, 신학적인 개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종류의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의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된 인류가 오래도록 여러 환경에서 살다 보니 피부색이 다양하게 변화된 것입니다. 피부색이 후천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과학자들이 입증해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해서는 학자들이 지금도 논쟁하고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절대적 존엄성의 이유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인간의 외모가 어떻든지 혹은 그에게 어떤 질병과 장애가 있든지 상관 없이, 인간은 누구나 절대적 가치를 가진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생각입니다.

몇 년 전, 버지니아 주의 쉐난도어 밸리에 사는 한 여성이 골동품 상에서 50달러를 주고 산 그림이 10만 달러의 가치를 가진 르노와르의 진품이었습니다. 그 그림은 오랜 세월 동안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전전하며 낡아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르노와르의 진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 즉시 진가를 인정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의 값을 시장 가치로 매깁니다. 어떤 사람은 한 시간에 7달러 50센트를 받고, 어떤 사람은 70달러를 받고, 또 어떤 사람은 7백 달러를 받습니다. 세상은 그 값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시간 당 7달러 50센트 받는 사람이든 7백 달러 받는 사람이든 혹은 아무런 수입이 없는 사람이든 우리는 그 모두를 동등하게, 절대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 보아야 합니다. 르노와르의 모든 작품에 그의 싸인이 적혀 있듯이,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싸인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둘째, 구원론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만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통해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선택의 이유를 오해 했습니다. 자신들에게 특별한 장점이 있어서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민족을 개에 비유할 정도로 민족적 우월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기에 선택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민족적 우월감은 그들의 죄성이 만들어 낸 믿음이었습니다. 그 민족적 우월감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구원의 도구로서의 사명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결국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어졌습니다. 그분을 통해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렸습니다. 그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어떤 자격 조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언어와 민족과 문화와 성별의 차이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고 하셨고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께서 자신을 이끄시는 방법과 방향을 보면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피력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롬 10:11-12)

인간이면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불행히도 하나님이 지으신 많은 작품들이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넘어가 창고에서 썩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작품을 찾아내어 원래의 가치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원래 주어진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가치를 되찾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어떤 조건이나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셋째, 종말론적 증거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깨어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깨어진 이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그 나라가 완전해질 날을 소망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갑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영광의 날을 믿고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성령께서는 환상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광경을 요한에게 미리 보여 주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그곳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영광의 빛으로 인해 해와 달이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그 영원한 빛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요한은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민족들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민족들의 영광과 명예를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계 21:24-26)

마지막 날에 임할 영원한 나라는 더 이상 언어와 문화와 피부색으로 인해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부활한 성도들의 존재에서 발산되는 빛 때문에 피부 색깔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얼굴에서 발산되는 영광의 빛 때문에 잘 생긴 사람도, 못 생긴 사람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 교회로 모일 때 우리는 믿음 안에서 모든 차이와 차별을 넘어 서서 한 형제 자매가 되듯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모두는 온전히, 철저히, 완벽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지금의 현실로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국 그 영원한 나라에서 모든 민족과 한 형제 자매로 살아갈 사람들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렇게 살아야 옳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끊임없이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시키고 차별 의식을 심어 주려 해도 우리는 믿음 안에서 바라보는 그 나라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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